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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 시애틀 추장의 연설



저 하늘은 수많은 세월 동안 우리 아버지들의 얼굴에 자비의 눈물을 뿌려 왔다. 우리에게 영원하리라 여겨지던 것들도 이제는 변하려 하고 있다. 오늘은 맑은 하늘이지만, 내일은 구름으로 뒤덮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영원히 지지 않는 별들과 같으리라.

아메리카 인디언 우아미쉬족과 수쿠아미쉬족의 추장 시애틀(Chief Seattle, 1780~1866)의 연설의 시작 부분 내용. 백인들은 시애틀 추장에게 그들의 땅을 팔면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시애틀 추장은 인디언 문화와 전통을 위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명을 위해 그 제안을 거절했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은 '변화'에 대해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물을 것이다. 얼굴 흰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우리로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려 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자연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고 될 수도 없다.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판단 말인가?" 시애틀 추장은 이렇게 묻는다.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를, 참 마음이 찔리는 물음이다. 나도 내 것이 아닌 것에 얽매이진 않았는지? 내 것이 아닌 것을 소유하려 들지 않았는지.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과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강의 물결과 초원에 핀 꽃들의 수액, 조랑말의 땀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다. 모두가 같은 부족, 우리의 부족이다.
(...)
그는(백인) 대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다. 어머니인 대지와 맏형인 하늘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결국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치워 사막으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물론 모든 욕심이 그런 건 아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상황이 많잖아. 밑 빠진 독에 강물을 퍼넣을 때, 그 많은 물들은 뭔 잘못이야? 너무 아깝다. 밑 빠진 독에게 문제가 있는거지 그 때문에 필요 이상의 물을 퍼붓는 건 강을 메마르게 하는 일이다. '사막으로 만들'어 버리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들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의 거미줄을 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거미줄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인간은 대지에 속한다. 이것이 인디언 부족들의 가치관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사람은 삶의 거미줄을 짜지 못하며, 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한다는 말은 자연 중심의 가치관을 잘 느끼게 해준다. 이 얘기를 듣고 '그럼 사람은 삶에 있어 주체적인 자리에 서지 못하고, 되는대로 수동적으로 살란 말이야?'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삶의 거미줄을 짜는 것은 사람이 아니지만, 삶의 거미줄을 이루는 것은 사람이다.